블리자드의 게임 오버워치의 시네마틱 영상을 시청했다. 블리자드는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묵직한 여운을 주는 대단한 시네마틱 영상을 잘 만들어낸다. 근래 여러 게임의 흥행 실패는 안타깝고 내부의 문제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만들어낸 훌륭한 유산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라인하르트의 대한 단편 “명예와 영광” 젊은 라인하르트와 스승 발데리히가 대비된다. 둘은 모두 전쟁의 최전선에서 방패를 세워 동료를 지키는 의무를 가진 크루세이더. 발데리히는 ‘명예로운 삶’을 위해 동료들을 지키고 라인하르트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각오하고 동료들을 짐으로 여긴 채 (의무를 망각한 채) 전장을 누빈다. 하지만 발데리히의 희생(영광스러운 죽음)으로 라인하르트는 동료를 위해 방패를 세워야 하는 본인의 역할(명예로운 삶)에 대해 깨닫고 그들을 지킨다.
“난 부름을 받았고, 응해야 하오. 언제든.” 시네마틱 초반 스승이 말하는 대사이자 자신을 위해 희생한 스승의 잔해를 보며 늙어버린 제자가 계승하여 말하는 신념. 100년 전 독일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말이 겹쳐진다. 부버는 유대교 학자 조부의 영향으로 종교적 체험에 몰두해 살아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 한 청년이 부버를 찾아와 면담을 부탁했지만 그는 아침의 종교 체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멍한 상태였다. 그 청년의 깊은 의미를 가진 질문들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는 청년을 돌려보냈다. 얼마 후 그 청년은 죽었고 부버는 이를 깊이 후회하게 된다. 삶은 종교적인 일로 자신의 만족을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그에 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저술한 부버의 책 [나와 너]에서 그는 세상을 ‘나와 너’로 관계하여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상대방을 그저 하나의 용건으로, 그가 가진 배경과 조건으로 나의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 대응하는 그저 ‘그것’으로 인식한 관계로 살아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타인의 부름에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라인하르트에게 동료란 자신보다 약하고 자신의 짐이 되는 ‘그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의무는 타인을 지키는 것이었고 끝내 그는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로 거듭난다. 나는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그것’으로 인식해버리고 마는가. 사랑의 태도로 타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니면 그저 이 사람은 내게 어떤 이익을 얼마나 가져다줄지 재고 따지고 있을까.
라인하르트가 독일의 군인이고 부버가 독일의 철학자인 건 우연의 일치일까? 스승의 죽음을 통해 받아들인 진정한 삶의 명예와 영광,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청년의 죽음으로 깨닫게 된 참된 삶. 아마 나는 평생을 살아도 이 둘이 추구하는 삶에 가닿지는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만남에서 존재할, 아니 이미 존재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의 부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를 찾아온 부름에 나는 응답하는가, 듣지 못하는가, 아니면 들어도 못 들은 채 그저 흘려보내는가. 아무튼 블리자드는 이런 멋진 시네마틱 좀 더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혹시 여러 게임의 시네마틱에 등장하는 멋진 주인공들을 모아서 AOS 게임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으려나. 그 게임의 시네마틱은 또 얼마나 멋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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